2018년 상명대학교박물관 소장 유물 특별전 <문방사우 : 선비의 네 벗>
- 작성자 박혜진
- 작성일 2021-03-10
- 조회수 13454
- 전시일 2018년 2월 19일 ~ 2020년 5월 14일
- 전시장소 서울캠퍼스 미래백년관 기획전시실
- 기간: 2018년 2월 19일 ~ 2020년 5월 14일
- 장소: 서울캠퍼스 미래백년관 기획전시실
- 내용: 학문과 지식을 위한 도구로 중시되어온 문방사우(종이, 붓, 먹, 벼루)를 중심으로 지통, 필통, 문진 등 소장품 130여 점을 전시하여 문방구 를 벗처럼, 보배처럼 아끼던 선비들의 마음을 살펴봄
문방의 네 벗, 문방사우(文房四友)
문방사우(文房四友)는 선비가 문방이나 서재에서 늘 다루는 도구인 종이와 붓, 먹과 벼루를 일컫는다. 중국에서는 ‘네 가지의 보물(文房四寶)’이나 ‘네 명의 제후(文房四侯)’라고도 불린다. 《소학(小學)》에 “紙筆墨硯 文房四友(지필묵연 문방사우)”라는 구절이실려 있을 만큼 학문과 수신(修身)을 위한 도구로 중시되었다.
종이와 붓, 먹과 벼루를 문방사우로 여기게 된 것은 중국 당나라 때 한유(韓愈)가 지은 《모영전(毛穎傳)》에서 이들을 의인화하여 소개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문방구에 대한 관심은 고전문화의 감상과 문학적 성취가 두드러졌던 송나라 때에 높아졌으며, 문방구 애호 취미는 문인 취향과 결부되어 명•청대로 이어졌다.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文房四寶’의 기록이 나타나는 등, 문방구에 대한 애호 풍조는 고려 중기 이후 왕실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문인 사대부를 중심으로 문방 문화의 확산과 함께 문방구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졌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글씨와 그림을 아끼는 풍조가 확대되면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관련 서적의 감상과 문인들의 활발한 감평 활동을 통해 심화되었으며, 문방품에 대한 감식이 교양의 척도로도 중요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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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서기 105년경 후한의관리였던 채륜(蔡倫)이 초기적인 종이 제작 기술을 개량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종이의 형태를 제작하면서 제지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종이와 제지법이 전해진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서기(日本書紀)》에 610년 담징이 종이를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7세기 보다 이른 시기로 추측할 수 있다. 종이의 발달은 인쇄술의 발달을 뒷받침하여 고려시대 대규모 불경 간행 사업과 서적의 보급을 가능하게 했다다양한 간행사업으로 인한 종이 수요의 증가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확대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관영 조지서(造紙署)에 관한 기록과 각 지방으로부터의 종이 진상 기록이 남아있으며, 대량의 종이 수요로 인해 종이의 확보와 제지법의 개량은 국가사업으로 중요시되었다.붓은 먹물을 묻혀 글씨를 쓰거나 안료를 묻혀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서화(書畫)의 필수품이다.초기적인 붓의 사용은중국의 은(殷)·주(周)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오늘날과 같은 붓의 형태는 진(秦)나라 때 몽염(蒙恬)이 개량하여 제작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지며, 전국시대 무덤과 한나라 무덤에서의 출토 유물을 통해 실제 사용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우리나라에서경남 창원 다호리의 철기시대 무덤에서 2천여 년 전의 칠기(漆器) 붓이 출토되어 오랜 사용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족제비털이나 토끼털 등의 짐승털로 붓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특히 족제비털로 만든 황모필(黃毛筆)이 유명했다. 조선시대에는 경공장에 필장(筆匠)이 포함되어 각지에서 공납한 황모로 붓을 제작하고 국가의 수요를 충당했으며, 필방(筆房)이나 필상전(筆床廛)에 붓을 공급하기도 했다. 전문 장인 뿐 아니라 문인들도 붓의 제작과 쓰임에 해박한 경우가 많았으며, 좋은 붓의 취득과 보관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먹은 문방사우 가운데 하나로, 벼루에 물을 붓고 갈아 먹물을 만드는 도구이다. 먹의 기원확실히 밝혀진 바없으나, 고대 중국에서 석탄에 옻(漆)을 섞어 사용하던->쓰던 것을 대개 한(漢)나라 이후부터->이후에 그을음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개량·제작하기->개량된 먹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여겨진다.우리나라에서 먹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 역시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 무덤[동수묘(冬壽墓)]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이나 담징(曇徵)이 먹의 제작법을 전해주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먹의 사용과 제작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일본 나라(奈良)에 소재한 고대 일본의 왕실 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신라먹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벼루는 먹을 갈아 먹물을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벼루의 기원은 묵서(墨書)의 흔적으로 보아 중국의 은(殷)나라 때까지 올려볼 수 있으며, 이후 칠기(漆器)로 만들거나 기와(瓦)를 이용하기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와 유사한 벼루의 형태는 한(漢)나라 때부터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 벼루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벼루로는 가야 및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연(陶硯)과 통일신라시대의 칠기 벼루(漆硏)를 들 수 있다.
벼루는 돌이나 나무, 옥, 금속, 도자기 등의 여러 재료로 제작되었으나, 대개 돌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에서는 벼룻돌 산지 중 단계(端溪)와 흡주(歙州)의 돌이 가장 유명하며, 우리나라에서도 단계석과 흡주석으로 만든 벼루를 귀하게 여기며 애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충청도 남포(藍浦)의 돌로 만든 벼루가 흔히 알려져 왔으나, 충청도 단양(丹陽), 평안도 위원(渭源), 강원도 정선(旌善), 경상도 안동(安洞) 등 각지에서 다양하게 생산되었다. 벼룻돌은 생산지의 지명으로 부르거나 돌의 색으로 오석(烏石), 청석(靑石), 자석(紫石), 녹석(綠石)으로 부르기도 하며, 돌의 특징적인 무늬를 들어 화초석(花草石), 화반석(花斑石)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